할리우드든 충무로든,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대한 영화산업의 의존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컴퓨터그래픽의 '튜닝' 없이 완성되는 영화는 거의 없는 상황이니까요. 이젠 웬만한 컴퓨터그래픽엔 그다지 놀라지도 않습니다. [박물관이 살아 있다](2006) 같은 영화, 1990년대 같았으면 천지가 뒤집힐 만할 영화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저 귀여운 수준이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건, 할리우드 컴퓨터그래픽의 역사라는 게 제대로 따지면 30년도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트론](1982)을 본격적 시작으로 보니까요. 하지만 그 전에 있었던 '원시적' 형태의 시도들을 살펴본다면, 그 역사를 조금은 더 길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휘트니 형제가 만든 [카탈로그](왼쪽). 존 휘트니는 히치콕의 [현기증](1958) 타이틀 시퀀스를
만들기도 했다. 한편 리 해리슨은 아날로그 컴퓨터를 이용해 리사주 디자인(Lissajous Design,
스크린에 기하학적 형태의 멀티 라인이 그려지는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다(오른쪽)
1940년대에 컴퓨터가 발명된 이후, 그것을 그래픽 효과와 결합하려는 실험은 꾸준히 있었습니다. 주로 군사용이나 건축, 과학 분야에 쓰기 위한 것이었죠. 이때, 아주 단순하게나마 영화와 컴퓨터그래픽의 결합을 시도했던 사람은 실험영화 예술가였던 존 & 제임스 휘트니 형제입니다. 그들이 만든 [카탈로그 Catalog](1961)는 최초의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되고 있죠.
MAGI(Mathematical Applications Group Inc.)에서 1967년에 개발한 신타비전이 만들어낸 3차원
이미지(왼쪽). 이것은 15년 후에 [트론]에서 상업적으로 이용된다(오른쪽).
3차원 그래픽은 1967년에 신타비전(Syntavision)이라는 시스템이 개발되면서 해결됩니다. 구형이나 박스 그리고 타원체 같은 기본형을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만들어냈고, 그것을 35mm 필름으로 출력될 수 있게 된 거죠. 하지만 할리우드가 이 기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까진 15년이 더 걸립니다. 1982년의 [트론]이 바로 이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니까요.
할리우드가 최초로 컴퓨터그래픽을 영화에 도입한 영화는 아마도 [이색지대 Westworld](1973)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영화에서 로봇인 율 브리너가 상대방을 보는 시점 쇼트에, 조잡하지만 컴퓨터그래픽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속편 격인 [퓨쳐월드 Futureworld](1976)에선 피터 폰다의 머리 이미지를 합성하는 데 성공하죠. 배우의 얼굴에 선을 긋고 그 선을 중심으로 각 교차점을 이용해 윤곽을 잡는 방식인데, 이후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1995)도 이 방식을 사용합니다.
III(Information International Inc.)는[이색지대]에서 로봇의 시점 쇼트를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냈다(왼쪽). [로건의 탈출]의 도입부를 장식한 스캐니메이트기법은 텔레비전 기술에서
온 것이다(오른쪽)
1970년대의 획기적인 컴퓨터그래픽 기술은 스캐니메이트(Scanimate)였습니다. 텔레비전 기술이 영화에 적용된 것인데요, [로건의 탈출](1976) 도입부에 사용되면서 호평 받았죠. 이 기술은 [스타워즈](1977)의 우주 공간 장면에 사용됩니다. 그리고 [에이리언](1979) 같은 영화는 우주선 내부의 계기판 비주얼을 위해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플래시 고든](1980)은 컴퓨터를 이용한 '합성'의 시대를 알린 작품이었죠. 비디오로 촬영된 고해상 화면을 합성하여 필름으로 전환하는 아날로그 방식이었지만, 컴퓨터그래픽의 상업적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일깨웠습니다.
스캐니메이트를 사용한 [스타워즈]의 우주 공간 비주얼(왼쪽). 90초의 짧은 시간이었다.
조지 루카스의 특수효과 회사인 ILM(Industrial Light & Magic)은 이후미국영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한편 [에이리언]의 계기판 비주얼은 영국의 왕립미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제작한 것이다(오른쪽).
[플래시 고든]에서 '밍'이 사라지는 장면(왼쪽). [스타트렉 2](1982)에서 '제네시스 효과'를
시뮬레이션한 장면은 당시 컴퓨터그래픽이 상당한 수준에 와 있음을보여주었다(오른쪽).
그리고 1982년, 드디어 [트론]이 나옵니다. 최초로 '영화적 컴퓨터그래픽'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되는 [트론]은 105분의 러닝타임 중 15분 정도가 컴퓨터그래픽이었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트론]은 '애증의 영화'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의 흥행 실패는 컴퓨터그래픽이 상업적 메리트가 있는 기술이 아니라는 인식을 제작자들에게 심어주었으니까요. 만약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면, 컴퓨터그래픽 기술은 적어도 10년 정도는 앞당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스타워즈] 이후 조지 루카스는 디지털의 중요성을 인식했지만, 최초로 디지털 우주선을 만든
곳은 ILM이 아니라 '디지털 프로덕션'이었다. 게리 데모스와 존휘트니는 [최후의 스타화이터]
(1984)에서 컴퓨터그래픽으로 우주선을 만들었다(왼쪽). 당시 ILM에서 일하던 존 래세터는
[피라미드의 공포](1985)에서, 스테인드 글래스에서 튀어나온 인물이 주인공과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컴퓨터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가 레이저를 통해 필름에 담기는 방식으로 만들어낸다.
래세터는 이후 픽사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토이 스토리]를 만든다.
한동안 침체기를 겪던 컴퓨터그래픽이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건, 제임스 캐머런과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라는 거물들 덕분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모핑(morphing) 기법이었죠. 두 개의 연속적인 사물이 합쳐져서 하나의 이미지가 되는 모핑 기법은 1987년에 더그 스미스라는 사람이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사용되고 있는 테크놀로지입니다.
[윌로우]에서 염소가 타조로 바뀌는 장면(맨 왼쪽). [어비스](가운데)와 [터미네이터 2](오른쪽).
모핑 기법의 진화는 매우 빠르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 기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영화는 루카스가 제작하고 론 하워드가 연출한 [윌로우](1988)였지만, 큰 각광을 받진 못했죠. 하지만 캐머런 감독의 [어비스](1989)에 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는 수중 에이리언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단순한 이미지 변형을 넘어 컴퓨터그래픽으로 어떠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첫 케이스였습니다. 75초의 러닝타임과 20개의 쇼트를 위해 8개월의 시간을 투자했으니 엄청난 집념이었죠. 2년 후에 나온 [터미네이터 2]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에게 컴퓨터그래픽이 '돈 되는 장사'라는 걸 확실하게 인식시킨 작품이었습니다. [어비스]의 프로그램을 발전시킨 캐머런 감독은 액체 금속 사이보그 T-1000을 만들어내죠. 컴퓨터가 만든 캐릭터를 실제 배우와 동일한 공간 안에 넣었다는 점이 획기적이었습니다. 마침 마이클 잭슨의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에 인상적으로 모핑 기법이 사용되기도 했고요.
[론머맨]의 사이버 섹스 장면(왼쪽). [죽어야 사는 여자]는 블루 스크린 앞에서 촬영한 이미지를
컴퓨터그래픽으로 합성했다(오른쪽).
이후 할리우드 컴퓨터그래픽의 춘추전국 시대가 열리고, 그 흐름은 1990년대 중반에 완성됩니다. 가상현실을 소재로 한 [론머맨](1992)에선 사이버 섹스가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 묘사되었고, [죽어야 사는 여자](1992) [마스크](1994) 등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결정타는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1993)이었죠. 이전까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던 괴수 영화는 스필버그를 통해 디지털로 재탄생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1994)는 컴퓨터그래픽 합성을 통해 역사를 다시 만들어내죠. 1995년에 픽사 스튜디오의 [토이 스토리]는 마침표를 찍습니다. 100퍼센트 디지털로 만들어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부자연스러움과 셀 애니메이션의 평면성을 극복한 혁명이었습니다.
[쥬라기 공원](왼쪽)과 [포레스트 검프](오른쪽). 두 영화는 컴퓨터그래픽의 가치를 할리우드에
확고히 심어놓았다. 스탠리 큐브릭은 [쥬라기 공원]을 보고 [에이.아이](2001)의 메가폰을
스필버그에게 맡겼다고 합니다)(오른쪽).
픽사의 힘을 빌리기 전부터 디즈니는 변하고 있었다. 1987년에 컴퓨터 애니메이션 프로덕션
시스템인 CAPS를 구축했고 [인어공주](1989)의 마지막 장면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했던
디즈니는 [미녀와 야수](1991)의 마지막 장면에서 3차원 효과를 냈다(왼쪽). 애니메이션의
혁명을 가져 온 [토이 스토리](오른쪽).
1990년대 중반, 컴퓨터그래픽의 기초 기술은 거의 다 개발되었습니다. 이후에 펼쳐질 컴퓨터그래픽의 역사는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고요. [쥬만지](1995) [스페이스 잼](1996) [플러버](1997) [스타쉽 트루퍼스](1997) [고질라](1998) [매트릭스](1999) [미이라](1999) [스타워즈 에피소드 1](2000) [할로우맨](2000) [파이널 판타지](2001)…. 그리고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킹콩](2005)을 거쳐 [트랜스포머](2007)와 흥행 고속 질주 중인 [아바타](2009)까지, 디지털이 빚어낸 '비주얼 쇼크'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